루터의 라이프치히 신학논쟁은 주로 엑크와의 대결로 전개된다. 엑크는 1500년에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교의학 박사를 얻은 바 있는 학자였다, 라이프치 히논쟁의 발단은 1518년 엑크가 루터를 공격함으로 일어난다. 이에 합세하여 카알슈타트가 380개 조항에 달하는 엑크를 반대하는 명제들을 썼고 멜랑히톤과 암스도로프도 동참하게 된다. 날짜는 1519년 6월로 확정되었다. 이 논쟁은 본래 엑크와 카알슈타트간의 논쟁으로 계획되었다. 이 논쟁에 대비하여 엑크는 12개의 명제를 작성하였는데 이 명제들이 결국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안 루터가 자기 나름대로 13명제를 작성하여 나서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이미 제22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위권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제1세 때에도 인정된 바 없다고 했고, 교황은 성서 밑에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에 반대한 엑크는 그의 제12명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로마교회가 실베스터의 시대 이전까지는 다른 교회들보다 우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성 베드로의 보좌와 성 베드로의 신앙을 소유한 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그의 명제 중 제13명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 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지난 4세기 동안 로마의 교황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교황칙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11세기의 역사적 증거는 이를 반대하여, 성서 본문과 가장 권위 있는 니케아회의도 이를 반대한다.> 루터는 엑크와의 논쟁을 중요시하여 교황, 전통, 권위, 등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이때 교부학에 관한 자료를 읽고 풀이하는 일을 멜랑히톤이 도와주었다. 1519년 6월 21일 엑크와 카알슈타트는 책상을 마주 보고 앉은 채 토론을 시작하였다. 흥분과 함성이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카알슈타트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을 추종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루터, 엑크, 카알슈타트, 멜랑히톤, 고위 성직사, 및 학생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기독타임즈 ⓒ무단전재 공유언론사, 협력교회 및 기관 외 재배포 금지 대전충청지역 대표 기독교주간신문사 기독타임즈(kdtimes@hanmail.net) 운영이사장=정민량 목사ㅣ 발행인=오종영 목사 ㅣ 사업본부장=이승주 기자 ㅣ 충청영업소=임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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